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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와 일본의 관계, 칠지도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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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드루와
댓글 0건 조회 121회 작성일 25-12-07 13:00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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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4년 스가 마사토모 라는 국학자가 

일본 이소노카미 신궁의 대궁사로 임명이 되어 

신궁의 오래 된 창고를 조사 하던 중 

녹이 슬어 낡은 검을 한 자루 발견합니다. 

 

그리고 녹을 조심히 제거해 보니 

검 앞면과 뒷면에 금으로 상감이 된 

글자들이 나옵니다

칠지도가 발견 된 것입니다. 

 

일본의 역사서 "일본서기"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옵니다 

 

"백제의 구저 등이 천웅장언을 따라와 칠지도 1구, 칠자경(七子鏡) 1면 등 각종 중요한 보물을 바쳤다"

-신공황후 52년 (서기 244년)

 

당시 일본에서 주장하는 임나 일본부설에 따르면 

일본이 신라 가야를 정복한 뒤 식민지로 삼았고 

백제 왕이 칠지도를 상납했다라고 나옵니다. 

 

 

 

바로 그 임나일본부의 역사적 기록의 증거가 

실제로 발견 되었고 난리가 났죠. 

 

다만 일본서기라는 책이 좀 독특한 서적입니다.

백제의 사건인데 일본으로 바꿔 기록하기도 하고 

특히 역사를 기록했는데 시간 순서와 내용이 엉망이죠 

일본서기는 기년 즉 년도가 맞지 않음으로 

임의로 2갑자를 수정해서 읽습니다 

 

무슨 역사책이라고 하는데 

1갑자가 60년이니 오차가 무려 120년입니다 

즉 일본 서기에 나온 244년의 기록은 120년 수정해서 

364년에 일어난 사건이란 뜻이 됩니다 

임나일본부가 설치 된 시대는 364년이 됩니다.

 

물론 그 당시 일본이란 국명은 존재하지도 않았지만 

이미 120년 오차가 있는 마당에 그 정돈 사소해 상관 없죠 

때문에 칠지도를 바친 백제의 왕은 

346년~372년 제위 한 근초고왕이 됩니다 

 

 

마침 칠지도의 첫 글자에 연호가 있습니다 

 

태X (泰X) 

 

중국 동진의 연호가 태화(太和)366년 ~ 371년입니다 

어라? 다 맞습니다. 

 

일본서기의 기록 + 칠지도의 존재 + 동진의 연호 

임나일본부가 역사적으로 증명이 되는 순간입니다. 

 

다만 좀 이상한 문제가 있었으니 

정작 가장 중요한 칠지도의 명문이 좀 이상합니다. 

 

〈앞면〉 泰△四年五月十六日丙午正陽造百練銕七支刀出(生)辟百兵宜供供侯王△△△△祥(作)

태△ 4년 5월 16일은 병오인데, 이 날 한낮에 백번이나 단련한 강철로 칠지도를 만들었다.

이 칼은 온갖 적병을 물리칠 수 있으니, 제후국의 왕에게 나누어 줄 만하다. △△△△가 만들었다.

〈뒷면〉 先世以來未有此刀百濟王世子奇生聖音故爲倭王旨造傳示後世

지금까지 이러한 칼은 없었는데, 백제 왕세자 기생성음이 일부러 왜왕 지(旨)를 위해 만들었으니 후세에 전하여 보이라.

 

네. 칠지도에 명문으로 "하사" 했다고 나옵니다. 

정확하게 왜왕을 백제의 제후왕으로 호칭하며 

후세에 잘 전하라고 쓰여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전 근대 국가에서 평시에 칼을 주는 것은 

군왕이 신하에게 신뢰의 표시로 주는 행위 입니다. 

 

여기에서 만약에 칠지도에 세긴 연호까지 백제의 연호라면 

그냥 빼박이 되어 버립니다. 

당시 일본은 백제의 연호를 쓰는 제후국이란 뜻이죠 

때문에 칠지도 연호의 정체를 두고 큰 논쟁이 벌어집니다.

 

연호가 정말 동진의 연호가 맞는가? 

 

일단 동진(東晉)의 연호 태화(太和)는 태 (太) 자를 사용하는데   

칠지도의 명문 태(泰)는 의미만 같지 획 수도 많고 복잡 합니다. 

검에 상감으로 어렵게 명문을 새기는데 

쉬운 太 라는 글자를 어려운 泰자로 바꿀 이유가 없단 것이죠 
 

때문에 한국 역사 학계 일부에서 2가지 가설이 나옵니다 

칠지도에 새겨진 泰△ 라는 연호는 백제의 연호다 !!

 

1. 칠지도의 泰△ 태X 는 백제가 사용한 별개의 연호다 

2. 칠지도의 글자는 태 (泰) 자가 아니라 봉(奉)이라는 글자다 

   泰△ 는 봉원(奉元) 이란 글자로 백제의 독자적 연호다 

 

더불어 칠지도의 명문 중에 하필 연호 부분만 

근대 메이지 시기에 고의로 훼손한 흔적이 있습니다

 

 

녹을 제거하는 과정에 우연히 훼손이 된 것이라 하는데 

하필 그 훼손 된 글자가 위에 언급처럼 논쟁이 되는 

매우 중요한 글자였던 것이죠 

 

한국 역사학계 측 주장도 물론 한계가 있습니다. 

삼국시대에 고구려, 신라의 경우 연호가 확인 되지만 

백제의 경우 이제까지 연호를 사용했단 증거가 

단 하나도 발견 된 바가 없습니다. 

때문에 백제가 정녕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했는지 알 수 없죠 

 

더욱 결정적인 증거가 있으니 무령왕릉 묘지석입니다. 

 

 

무령왕릉은 백제왕의 무덤 중에 유일하게 도굴이 안되고 

온전하게 발굴이 된 무덤입니다. 

 

그 무덤에서 토지 신에게 땅을 사는 의식을 치르고 

그 내용을 남긴 묘지석이 발견되었는데 

연도를 백제의 연호가 아닌 간지로 기록합니다 

 

"영동대장군(寧東大將軍) 백제 사마왕(斯麻王)은 나이가 62세가 되는 계묘년(癸卯年, 523년) 5월 (병술일이 초하루인데) 임진일인 7일에 붕어 하셨다. 

 

중국에서 받은 작위 명칭과 함께 백제 연호가 아닌 

계묘년이라는 십이간지를 적고 있습니다. 


광개토대왕비에 고구려 연호가 발견되고 

진흥왕 순수비에 신라 연호가 발견되는 것과 차이가 있죠

즉 백제는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이 주장도 한계가 있습니다. 

앞서 고구려, 신라의 비석은 업적을 기리는 비석이고 

무령왕릉 묘지석은 토지 신에게 바치는 증표일 뿐입니다. 

 

더불어 묘지석은 2중적인 백제 왕의 외왕내제를 보여줍니다 

중국으로 남조의 왕조로 부터 받은 작위를 기록하면서 

동시에 황제가 죽었을 때 사용하는 붕어(崩御)라는 단어를 씁니다 

즉 백제의 왕이 황제라는 뜻이죠 

 

더불어 연호의 사용을 논하자면 똑같이 반대 논리도 가능합니다 

묘지석에도 중국 남조 연호를 사용 안했죠. 십이간지를 사용했습니다. 

 

다시 돌아와 칠지도의 태X(泰X) 연호를 보면

동진의 연호라고 하기에도 뭔가 미심쩍고 

그렇다고 백제의 연호라고 하기에도 근거가 없습니다 

 

백제가 연호를 사용했단 증거가 없고 

태화라는 연호를 사용한 동시대 국가가 있는데 

증거 없이 유력 가설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이런 이유로 역사 학계 주류 학설은 

동진의 태화(太和)로 보는 것이 다수설입니다.

 

그럼 백제의 하사품이냐 진상품이냐 논쟁은? 

 

대충 중간 지점에서 타협을 해서 

당시 백제와 왜가 나눈 양국 우호의 증표라고 봅니다 

 

물론 아예 명문으로 제후왕에게 주는 하사품이라 써있는데 

이게 뭔 소리인가 싶지만 일본 측 역사 학계도 완강합니다. 

 

해당 칠지도의 명문은 모두 "길상구" 라고 주장합니다 

즉 실제 왕과 신하의 상하 관계가 아니라 

듣기 좋고 복이 있으라는 뜻으로 쓴 형식상 문구라고 합니다. 

 

그럼 칠지도의 진짜 의미는 무엇일까요?

 

역사는 역사 책의 문구 해석으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고고학을 통해 당시 실제 상황을 함께 봐야 합니다. 

 

(야요이 시대 왜인들 무장 상태 추정도)

 

 

(가야 지역 철제 갑옷과 철기병 마구 복원) 

 

 

 

 

삼국 시대 왜 열도에서는 

자체적으로 철을 생산하지 못 했습니다. 

 

그러니까 임나일본부설의 각종 이론을 떠나

당시 일본은 한반도 국가를 상대할 수 없었죠 

짧은 단창과 단검 수준의 무장을 한 왜인들이 

철갑과 철기병을 운용한 가야의 군대를 상대할 수 없습니다 

 

임나 일본부설이 부정 된 이유는 단순합니다 

그것이 물리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럼 당시 일본은 어찌 철을 구했는가? 

백제와 가야의 철을 수입해서 사용했습니다 

 

 

 

 

철정이라 하여 철을 가공하기 쉽게 만들어 묶은 것을 

당시 마치 화폐처럼 백제와 왜의 무역에 사용했습니다 

이 철정들은 일본 덴노의 무덤과 각종 고훈에서 

다량으로 출토가 됩니다 

 

즉 백제와 가야의 철은 죽어서 무덤까지 가져갈 정도로 

당시 왜 열도 지배층들에게 위신제로 큰 역할을 했습니다 

 

당시 왜 열도에서 백제와 가야와 무역을 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엄청난 권력이자 힘이었습니다. 

일본 중부 지방의 야마토 정권이 일본을 통일하게 된 것도 

이들이 백제와 독점 무역을 하면서 주변을 압도했기 때문이죠 

 

이제 칠지도의 의미도 명확해 집니다. 

 

 

-이 칼은 온갖 적병을 물리칠 수 있으니, 제후국의 왕에게 나누어 줄 만하다.

지금까지 이러한 칼은 없었는데 왜왕 지를 위해 만들었으니 후세에 전하여 보이라.-

 

백제가 당시 우수한 선진 철제 무기 기술을

왜국의 왕에게 보여주며 선물하였고

왜왕이 이를 받아 감격하여 1천 년 넘게 보관을 해 온 것입니다. 

 

백제는 고구려와 전쟁을 하며 인력 수급이 다급했음으로 

왜왕을 통해 왜인들을 인력으로 공급 받아 전쟁에 투입했고 

왜왕은 그런 백제왕에게 협력 하며 우수한 철기 기술을 받아 

왜 열도를 통일하여 중앙 집권 국가를 만들 수 있었습니다. 

 

양국 교류의 상징적인 유물입니다. 

 

 

끝. 

 

 

* 역사 관련 글은 읽을거리 판에도 함께 올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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